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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남의 기획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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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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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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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9
나의 비밀일기(8)

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 / 유니스 윤경남 옮김
 



(지난 호에 이어)

하루 종일 밤늦도록 망치소리가 요란했다. 그 망치가 못을 몇 개나 박았을까? 이만 개쯤 될 것이다. 이탈리안은 못에 대해선 본능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다. 끝없는 사막에 단 한 그루 서있는 야자수 그늘로 이탈리안을 쫓아버린다면, 다음 날 그 사람의 웃옷이 외로운 야자수 줄기에 박아놓은 못 위에 걸려있음을 보게 되리라.

이탈리안은 언제나 자신의 손을 못 위에다 걸어놓을 준비가 되어있다. 3개월 밖에 안된 내 아들이 아기 침대에서 나와 본 적도 없었는데, 어느 날 카페트에 박혀있는 못을 빨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1912년 롬메리나의 공문서에는, 어떤 아기가 손에 붓을 쥐고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노벨로 대위의 망치소리!”

118번 막사는 얼마나 여러 번 그 지겨운 망치소리에 떨었는지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망치가 두 쪽이 났다. 가운데 나사가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나는 기쁘기만 했다.

그 도구는 수리하는데 필요한 모든 연장을 다 갖추고 있었지만, 주머니칼이 달린 연필이 자기자신을 뾰족하게 깎을 수는 없는 것처럼, 그 도구는 스스로 작동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키가 육 척이 넘는 스키 선수가 그것을 고치는 방법을 알아내고 말았다.

“노벨로 대위의 망치!”

나는 그 망치를 내 베갯속 짚 더미 안에 감추어 보았으나 그날 밤 내 꿈에 그 못이 내 목을 찌르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그 망치가 내 베개에서 비상 탈출하여 베개를 두드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음 날 밤에는 그것을 내 침대 매트의 발치 속에 감추었다. 그날 밤의 악몽은 더 무시무시했다. 냉엄하기로 유명한 초기신형 펜치로 내 큰 발가락을 끌어가고 있는 꿈을 꾸었다. 나는 아파서 비명을 지르며 깨어보니 내 발가락이 실제로 그 망치 부속 펜치에 물려있는 게 아닌가!

“노벨로 대위의 망치!”

어느 날, 그 망치가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 망치가 새로 건립한 이탈리아 공화국의 투표권을 행사하러 갔다고 말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 망치가 벽에 난 구멍에 빠져서 사랑을 위해 죽었노라고 암시하기도 했다.

3주가 지나자 그 망치는 한바탕 기분전환을 하고 돌아왔는데 우리는 방탕한 아들이 돌아온 듯 그를 쓰다듬어 주고 깨끗이 닦아주고 살찐 송아지까지 잡아 먹이며 받아주었다.

그러자 망치는 곧 전보다 더 거만하게 망치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우리는 그의 폭정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 캠프에서 저 캠프로 옮겨 다녔는데, 1944년 5월5일 저녁, 우리 새 막사에서 독일 병사 한 사람이 망치를 현행범으로 잡았다.

그 망치는 67번 막사에서 온 중위와 함께 가련하고 순진한 독일인 손톱에 생명의 위협을 주고 있다가 잡힌 것이다. 이것이 그 망치의 마지막 운명이었다. 그러나 이따금 지루한 오후나 한밤중에 벽을 두드리는 듯한 이상한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노벨로 대위의 망치 유령이 복수를 하려고 부르짖는 듯한 소리였다.

 

시뇨라 게르마나아(Signora Germania)

게르만이여, 당신은 나를 철조망 안에 가두고 내가 빠져나갈 것을 막기 위해 보초를 세워놓고 있소. 허지만 모두 소용없는 일이오. 내가 빠져나갈 수 없는 건 사실이오만 들어오는  일은 쉽다오. 철조망이 나의 추억과 나의 사랑을 방해하진 않기 때문이오. 그뿐만 아니라오. 하느님도 그 울타리를 넘어 들어와서 내게 당신네 규칙과 반대되는 규칙을 가르쳐주신다오.

게르만 족속이여, 당신은 내 배낭을 뒤지고 볏짚 매트리스를 조사하지만 모두 헛일이라오. 그 속에 당신이 손 댈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오. 나는 다만 중요한 비밀문서를 간직하고 있소. 하나는 내 집 청사진이고, 또 하나는 과거와 미래의 수많은 영상과 상상이라오.

또 있지요. 나는 백 마일을 1인치로 축소한 지도를 어딘가에 숨겨두고 있다오. 거기엔 하느님의 정의를 믿는 내 신념을 다시 발견할 장소가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지요.

게르만이여, 당신은 나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지만 모두 헛일이라오. 당신이 화를 내며 나를 땅바닥에 엎디게 할 강력한 새 무기를 쓰는 날엔 오히려 당신이 놀라 자빠질 일들이 생길 것이오. 그가 일어나 철조망을 넘어 눈 옆에서 사라지기 전에 그에게 꼬리표를 달아줄 시간도 없을 것이오.

게르만이여,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요. 겉으로 사람을 못살 게 굴기는 쉽겠지만, 그 사람의 마음 속엔 또 다른 자아(自我)가 있어서 그 자아는 오직 하느님께만 순종한다오. 그려니 게르만이여, 이것이 바로 당신이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라오.

 

게르만 사람들 / 2월 3일

저들은 냄비에 물을 가득 붓고 고기와 분말요리를 적당히 섞어서 저은 후에, 밀폐한 뚜껑을 덮고 가스에 불을     붙인다. 그런 다음 밸브에서 쉬익 하는 휘파람소리가 나면 국이 다 된다.

전쟁할 때에도 저들은 그와 똑같은 방법을 쓴다. 냄비 속에 인간의 살덩어리와 폭발물과 군사과학에서 뽑아낸 요리를 넣고, 비타협적인 기율이라는 뚜껑을 덮은 다음 요리가 다 되었다고 휘파람 소리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휘파람 소리만 나는 건 아니다. 냄비가 산산조각으로 폭발해버리기도 한다.

 

2월 1 2 일

 잊을 수 없는 음성이 있다. R중위의 음성이 그러하다. 그의 음성은 전형적인 베네치아의 부드러운  억양으로 처음부터 틀이 잡혀있고 설탕에 저린 듯하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은 무슨 말이든지 달콤하고 끈끈한 파리잡이 끈에 글을 쓰듯이 말하는 것 같다.

막사  안에서는 수십 명이 모여 얘기를 나눈다. 어떤 사람은 튕기는 듯한 단음으로, 또 어떤 사람은 노래하듯이 말한다. 대부분은 높은 소리에서 낮게 속삭이는 소리로, 떠들썩한 소리에서 아주 조용한 소리로 다양하게 말한다.

그런데 R중위의 음성은 수도꼭지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소리이다. 다른 음성이 낮아지면 의례히 그의 음성이 들려온다. 마치 자수를 놓는 듯이   바늘이 보였다 가려졌다 하면서 수를 놓지만, 바탕은 그대로 있는 것처럼 R중위의 음성을 나는 오랫동안 기억하게 되리라.

정확하게 강조하며 달콤하게 말하곤 하는 그의 음성을, 그의 이야기 내용이란 비프스테이크와 장조림에 대한 것, 쌀에 붙은 엽조과자와 쵸콜렛 등 고향에서 부쳐주는 음식들에 대한 평범한 내용이다.

지금도 내게 고통스럽게 들려오는 음성은 그날 그날의 선전문 작성 안을 읽어 내려가던 금속성의 목소리가 그 때처럼 고통스럽다.

“첫째, 미국은 전쟁에 개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둘째, 영국 함대는 마비되었다. 왜냐하면…“
 

군중

개인은 군중 속에 있을 때 최악의 상태에 빠진다. 그래선지 밀집한 군중 속에 재빠르게 밀어 넣는 강철같은 기율에 자기의 개성을 기꺼이 내맡기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민족적인 증오심이나 전쟁에 더 말려드는 것 같다.

이탈리안들은 그러한 추세에 따라가지 않는다. 그런 추세를 활성화 하기보다는 오히려 희생하는 편이라고 하겠다.
 

빛 줄기

네 개의 흑색 진주가 붉은 가슴 속에서 반짝이고 있다. 네 개의 작고 검은 태양 덩어리가 우울한 회색빛 하늘에 빛나고 있다. 그의 아이들 눈동자가 사방에서 그를 내려다 보고 있다.
 

의문과 해답

장래 문제에 대해서 정열적인 관심들을 가지고 있다. 어떤 포로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항상 분석하다가 이탈리아는 스위스처럼 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결론을 내리곤 한다.

 그 외의 더 많은 사람들은 더 미쳐 있다. 그들은 이탈리아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하면서 고대 로마를 한 예로 들먹거린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knyoon
윤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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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9
2019-09-16
나의 비밀일기(7)

 

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 / 유니스 윤경남 옮김

 

 


죠반니노 과레스끼 삽화

 

 

(지난 호에 이어)
필사적인 마지막 전투와 가을의 패배를 몰아온 흩어진 대열에 몰아치는 회오리바람 같은 것이, 작품 제데르몽(Jedermaun) 속에 릴리의 젊은 애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불안이 똑같이 깃들어 있다.


“사랑하는 이여, 막사 문 밖의 가로등 밑에서 그대가 어언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는가 기억하노라---”


 원문이나 노래의 가락 속에서 우울함과 서정적인 주제를 똑같이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운명과 맞서 행진하고 있고, 그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계속 행진해 나간다.


“---그때, 음악소리가 그치자 밤의 고요 속엔, 무언가 운명적이고 무언가를 위협하는 듯한 끝없는 영사의 발자국 소리와 자갈 밟는 말발굽소리만이 흘러 넘쳤다---”


이 구절은 릴리 말렌의 종말을 연상케 한다. 마지막으로 장송을 알리는 종소리 같이 북소리가 일제히 들려온다 둥—둥.


“장미꽃 한 송이 주오, 내 가슴에 달리라. 그대의 황금 머리칼을 잡아 묶어 두리라---”


두 가지의 꽃이 있다. 제데르몽(Jedermaun) 에 나오는 가을꽃과 릴리 말렌의 봄꽃이다. 오늘같이 괴롭고 불안한 날엔 그 노래를 생각하며 그 노래의 울림과 책의 메아리가 조화를 이루는 듯이 느껴진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변화하는 계절을 안고. (註; 실제로 전쟁은 2년 후 5월에 끝났다. )


다시 말해서 여러분은 릴리 말렌의 슬픈 가사가 어떤 예감을 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독일인들이 온 유럽을 유린하고 온 세계가 그들 앞에 떨고 있을 때였지만 나는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저건 전쟁의 노래가 아니다. 뭔가 슬픈 징조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야. 비체르트(Wiechert) 가 말한, 어딘가 운명적이고 전율을 느끼게 하는 노래다.”


 
미치광이, 12월 10일


몇 사람이 모여 앉아 설계와 스케치를 종잇장에 그리면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집을 다시 짓기도 하고 가구의 위치를 바꾸기도 하며, 거실에 벽난로 쌓을 궁리를 의논하기도 한다. 그것은 단순하고 순박한 향수이며, 자기 생명의 가장 중요한 중심을 향해 안전한 줄을 쳐둘 필요가 있다는 몸짓이다.


어떤 사람들은 강연에 몰두하기도 하고 역사, 정치, 철학, 예술, 문학 등에 관한 토론에다 몸을 내맡기기도 한다. 프로우스트(Proust)나 그로체(Croce), 마르크스(Marx), 세잔느(Cezanne), 레오파드를 논하기도 한다. 그것은 자기보존의 본능이며, 라게르 수용소 내의 습하고 답답한 공기에 산소를 주입할 필요성이 있음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도 있다. 전쟁에 대한 의견을 묻고 이 전쟁은 얼마나 오래 끌 것이며, 전후엔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물어보려고 이 막사, 저 막사로 돌아다니는 사람들…그것은 성격적 결함을 드러내고 있지만, 지루함과 공허감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음식 생각만하고 음식 이야기만 한다. 그것은 완전히 미치광이 상태다. 물론 우려는 배가 고프다. 굶주림은 시시각각 우리 머리 위를 맴돌고 밤이면 우리의 꿈 속까지 찾아온다.

우리는 그 사실을 피할 수도 없고 치료할 수도 없는 병적 상태로 체념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더욱 미쳐가고 있다. 대화의 주제는 오직 음식 얘기뿐이다.

아침 식사와 점심, 저녁, 간식, 밤참까지 계획을 세워놓는다. 샌드위치를 떠올려 설명해 대고, 귀향한 다음 벌일 대향연에 필요한 메뉴를 그려놓기도 한다. 멋진 레스토랑과 지방 특산물로 만든 음식의 이름을 수집하여 요리책을 펀집한다.

아니면 아주 복잡한 요리 비방에 주석을 달기도 한다. 먹을 것에 대한 쓸데없는 잡담과 먹을 것에 골몰하는 무익한 생각은 오직 식욕만 돋울 뿐이다. 이 사람들의 열띤 상상 속에는 그들의 욕망의 크기에 비례하여 밑 빠진 독같이 되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미치광이는 근심이 가득 차 있기도 한다. 그것을 고치는 의사는 뼈만 남게 된다. 그들의 얼굴은 못 먹어서가 아니라 굶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노랗게 피어있다.

 

가정 통신

 저들은 우리에게 첫 편지 양식을 주었다. 그 안엔 독일어로 된 긴 지시내용이 있고 이탈리아어를 쓸 작은 공간을 남겨둔 한 장의 종이 쪽지였다. 그 종이의 오른편 칸은 답장을 쓰게 했고, 우리가 그 선을 침범해선 안 되었다. 더구나 연필로 꼬박꼬박 쓰고 점선을 넘어서도 안 된다.

 다시 말하면 국적이 다른 포로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목적인 국제 관습을 지켜야 했다.

우리는 또한 프랑스어로 지시내용을 쓴 둘로 접는 엽서를 배급 받았다. 그 엽서 의 반쪽을 잘 포장한 소포에 부치면 어떤 소포든지 이탈리아로부터 우리가 있는 임시 거주지 사이의 수송을 보장해 준다는 것이다.

N대위는, 우린 겨우 24줄만 배당 받았다고 불만스럽게   내게 말했다. C 대위는, 이 24줄은 소포를 보내달라는 지시내용까지 포함해야 하므로 웃어넘길 일이 아니라고 덧붙여 말했다.

“간결, 이것이 주지사항이다.” 하면서, M대위도 끼어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개개인의 노력의 결과를 합산하여 열심히 작업하기 시작했다.

N대위는 집안 소식이 듣고 싶어서 한참 궁리 끝에 좋은 착상을 만들어 왔다.

“집안 소식을 알려달라.”

C대위는 단지“털옷과 속털옷을 보내달라.”고 했다.

 이런 생략형의 메시지가 공동으로   인정을 받은 후 우리는 10파운드

이내의 무게로 스티커를 부치고, 놀이 카드와 가연성 액체는 안 되지만 담배, 그리고 곡류가 든 식사는 넣어도 된다는 규정을 설명해야 하는 마지막 난관을 통과했다. 그것은 정말 어려운 문제였는데 우리는 그것을 간결한 문구로 해결했다.

즉 “스티커 붙인 1 0파운드의 튼튼한 소포로 카드, 가연성 액체 불가하나 담배, 밀, 보리식사 가능.”

나는 전에 자주 훑어보았던 구인광고가 생각났다. 그러나 그 추억은 나를 미소 짓게 하지 않았다. 단지 나의 향수를 더해줄 뿐이었다. 이 철조망 뒤로 옛날 나의 즐거움은 사라져 가고 나는 오직 네가 보고 싶을 뿐이다.

회색 빛으로 빽빽하게 인쇄된 페이지들, 한 줄에 10리라 하는 미치광이 문학과 독자적으로 쓰는 너의 시(詩)가 있었고, 평범한 세계의 시(詩)가, 생활의 리듬이 있었다.

나는 우리의 규격편지를 짝 맞추고 있는 혼성언어들에 귀를 기울이며, 그 옛날의 구인광고와 이미 깨어진 지 오래인 리듬의 추억에 잠겨있었다. 백지 위의 맨 끝 줄에 다음과 같이 절망적인 메시지가 붙어있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어린 소년이 매일 저녁 멀리 가 있는 그의 아버지를 찾고 있음.>

 

*******

 

“스티커 부쳐서 10파운드 내에 단단히 포장할 것…”

나는 오래 전에 Corriere della Sera 신문에 난 구인광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 때 나는 속기사 자리와 방 한 칸짜리 아파트 광고들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웃지 않았다.

‘저 편지 형식은 내겐 괜찮은 편이야, 나도 저 서식은 쓸 수 있어’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서 연필로 점선을 잘라서 각국의 죄수들의 안전을 위해 규정한 대로 깨끗이 쓰기 시작했다.

“나의 아내에게; 스티커 부쳐서 십 파운드 이내로 단단히 포장하오. 놀이 카드와 가연성 액체 금물이지만 털 속옷, 담배… 그리고 마른 밤을 보낼 것. 하지만 마른 밤이 어린 우리 아들놈에게 더 좋다고 생각되거든 그 애에게 주시오. 나는 정말 아무 것도 필요 없소.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 이것뿐이요. 즉 성탄전야엔 가능한 한 화려한 식탁을 준비해주오. 제일 좋은 은 그릇과 유리잔을 수놓은 식탁보 위에 꺼내 놓고 등을 모두 밝히시오. 큰 성탄나무를 세우고 당신이 지난해에 그랬던 것처럼 창문에 그리스도 탄생의 그림을 걸어두오.

아내여! 이 모든 일들은 나를 위해 해두어야만 해요. 매일 밤 나의 사념은 이 철조망을 뛰어넘는 다오. 생각은 얼굴이 없기 때문에 당신이 그 모습을 확실하게 그려낼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오. 생각은 바람 속에 이는 한낱 광풍 같은 것, 철조망을 뛰어넘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오. 이 죠반니노가 고요하고 추운 겨울 땅에 꿈처럼 밝게, 바람처럼 넘나드는 모습을 그려보시오.

매일 밤, 사람들이 잠들면 나는 낯선 땅과 낯선 도시의 경계선이 없는 침묵을 넘어서 날아가오. 내 밑의 모든 세상은 어둡고도 슬프오. 그래서 나는 오직 빛과 평화를 찾고 있소. 우리 밀라노의 대성당 꼭대기에 있는 마돈나 동상이 보이는구려. 그러나 그 거리와 광장은 예전 같지 않구려. 우리가 살고 있는 5층 집도 찾기가 힘이 드오.

나의 아내여! 내가 지붕을 뚫고 들어간다고 해도 나를 분별없다 마시오. 게다가 지붕엔 구멍이 있지요. 그래서 난 더 재빨리 들어갈 수 있소. 나는 우리 망이 정돈된 것을 알아볼 수 있으며, 벽 밑에 낀 먼지도 생각난다오. 그런데 여긴 온통 어둡고 춥고 슬프다오. 오직 달빛의 도움으로 벽에 아직 걸려있는 타피스리와 전엔 그렇게 잘 배치하곤 했던 가구의 위치를 알아내려 할 뿐이오.

달로 변장한 공포라는 괴물 외엔 아무도 이 폐허의 거리를 걷는 사람이 없소. 벽지조각 위엔 다섯 이파리가 달린 이상한 꽃이 보이오. 여보, 알베르띠노가 지워지지 않는 잉크 속에 담근 손으로 벽그림을 장식했던 일을 기억하오? 지난 날의 추억을 더듬기 위해 낡은 건물을 뒤진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오. 그 건물은 지금 거기에 있지도 않건만, 그 자리엔 연기로 그슬린 잡석만이 썰렁하게 서 있구려.

이제 나는 어두워진 도시를 떠나 당신과 내가 소년 소녀였을 때 함께 갔던 그곳에 다시 가보았소. 다시 한 번 울적함만이 나를 맞아 주었소. 드디어 나는 내게 남은 재산과 어린 날의 그리움이 숨쉬고 있는 허술한 오두막집까지 왔소. 당신도 알베르띠노도, 어머님과 아버님도 모두 잠들어 있소. 아마 꿈 속에서 나의 식구들은 아무도 모르는 내 길을 찾고 있을 것이오. 그늘지고 조그만 방 안엔 가구가 어지러이 널려있고 내 책상 속엔 얼어붙은 낱말들이 페이지마다 붙어있소.

나의 아내여! 빛과 따뜻함과 평화만을 쫓다가 나는 오직 추위와 어두움을 만났소. 내 아들의 얼굴도 알아볼 수가 없구려. 호숫가는 텅 비어 있고 불빛도 없소. 나는 근심을 안고 철조망 친 담을 넘어 다시 날아왔소. 딱딱한 침대 위에 6865 번의 굳은 뼈가 퍽 소리 내며 쓰러집니다.

여보! 성탄전야에 나의 온갖 사념이 철조망을 뛰어넘을 때 그 사념은 반드시 밝고 따뜻한 구석을 찾을 것이오. 밝은 빛에 눈이 부셨으면 좋겠소.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내가 옛날에 누렸던 그 평화를 되찾고 싶소. 그렇지 않다면 전쟁의 포로에게 무슨 재미가 있겠소?”

여기까지 쓰고 나자 나는 내게 배당된 24줄이 넘었다는 느낌이 들어서 쓰는 일을 갑자기 중단했다. 실제로 내가 쓸 24줄은 물론이고, 답장 칸의 24줄, 그리고 옆에 붙은 5개의 다른 서식까지 모두 차지하고 말았다. 마음이 꺼림직하여 나는 내가 쓴 150줄을 긁어내고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다.

“스티커 부쳐 십 파운드 이내로 단단히 포장하여 놀이 카드와 가연성 액체 말고 털 속옷과 담배를.”

“십 파운드 이내”란 말을 검열관이 보면 악마의 폭발물로 오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친구가 고향에 편지쓰려고 앉으면 무슨 말부터 써야 좋을지 모르겠더라고 말한 우울한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오늘부터 10년 후에 쓴다면

  몇 년 전이라고요? 죽은 세월을, 흘러간 날들을 따져본들 아무짝에도 소용 없는 일. 누군가가 지나간 세월, 앞으로 다가올 세월을 더듬고 있다. 우리는 큰 성탄나무를 세우고 종이쪽지에 선물 이름을 적었다. 나는 한 선물에 2파운드의 누가 사탕이라고 썼다. 그것이 나를 즐겁게 해주었지. 누가 사탕은 언제나 내 가슴을 뛰게 했으므로.그런 다음엔 로베르또 레보라〔Roberto Rebora) 중위가 자작 시(詩)를 낭독했다. 그 내용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1943년 성탄에

 

다정한 거리에

붙어있는 집 속에 움직이지 않는 시계에서

쓸쓸한 겨울 아침이 태어났네.

달은 얼어불은 지붕 꼭대기에서 머뭇거리다가

정체불명의 벽과 어두운 정원과

계곡의 신화적인 추억을 짚어가고 있다.

아직도 꿈 꾸는 거리에선

현실을 이해하려고, 아직도 꾸물거리는

인간적인 시도가 있다.

속삭여 오는 단순한 가락들이.

높은 하늘이 굼뜨며 중재하는 그곳.

잃어버린 영상의 혼잡 속엔 말없는 폭력이 있다.

공간은 뜬 눈 밖으로

칭찬의 말을 두려워하누나. 조심스럽게

대지는 그의 태초로 다시 돌아가려는지.

이젠 팽개쳐진 성탄에 쓸려간 거리를 누비며

방황하는 그 이름 위에 의미 있으라.

 

이 시(詩)는 그 당시 그 장소에선 훌륭한 시(詩)가 될 수 있었다. 오늘은 더 이상 이해 못하겠다. 시(詩)란 이해하기 보다 느끼는 쪽이므로.

그 다음엔 내가 쓴 우울한 산문을 내가 읽었고, 코폴라(Coppola)는 아코디오에 맞춰 그의 자작곡을 연주했다. 바깥 하늘은 맑았고 나는 다가오는 날들을 생각했다. 철조망 뒤의 그림자 속에 나의 미래에 닥쳐올 모든 동작이 들어있다. 지금 나는 과거의 행동만을 볼 수 있으며 수심에 젖어 라게르(Lager) 수용소 333을 그리고 있다.

 

***    

어젯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나는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침실 벽장문을 가만히 열고, 내가 십년 전에 입었던 다 낡은 군복을 꺼냈다. 나는 그것을 입고 도금칠한 5개의 단추를 채웠다. 1~ 2분이 지나자 나는 더 이상 숨을 쉴 수가 없는 게 당연했다. 단추는 총알처럼 떨어져 나갔다. 그 중 한 개는 별똥처럼 튀면서 베개 위에 떨어졌고 다른 한 개는 알베르디노 2세의 헝클어진 머리칼 속에 파묻혀 버렸다. 시(詩)와 나의 비만증세 때문이다.

10년 후, 밀라노에서: “베니아마노보(Beniaminovo)에서 지낸 즐거웠던 옛날!”을 씀.

 

우리가 달고 있는 별들은(1944)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오. 겉으로 사람을 못살게 굴기는 쉽겠지만, 그 사람의 마음 속엔 또 다른 자아(自我)가 있어서 그 자아는 오직 하느님께만 순종한다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라오.” -본문 중에서-

 

감시탑 1월 15일


어디를 돌아보아도 배후엔 탑이 서있는데, 그것은 마치 하느님의 눈동자와도 같이 무소부재(無所不在)하게 경계하고 있다. 그들 편이라고 말하는 그들의 하느님은 우리의 하느님과 아주 다르다. 그들은 자기 하느님에게 Gott라는 험한 이름을 붙여 주었다.


 

영원한 위험 1월 20일


전쟁의 이야기는, 러시아와 크로치아와 알바니아와 몬테니그로와 북아프리카의 이야기이며, 하늘과 땅과 바다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우리는 수많은 생명이 살고 있음을 본다. 그래서 전쟁은 수많은 에피소드를 번식한다. 이제 전쟁이란 단순한 낱말이 아니며, 전쟁을 겪지 않은 이들의 이익을 위해서도 전쟁을 지지해온 지옥 같은 증거가 들어있는 개념인 것이다.


그러나 내일이면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문학의 소재로 바뀔 것이다. 비평가들은 전쟁 자체에 대해서보다는 전쟁에 대해 쓴 책을 비평할 것이다. 레마르크가 쓴 “서부전선 이상 없다”라는 책에 대해서도 이렇게 설명하리라. “얼마나 굉장한 책 인가!”하고. 그런데 아무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 “얼마냐 끔찍한 전쟁인가!”

 

임시 막사 1월 29일


우리가 들어있는 임시 막사들은 바퀴가 모래 속에 파묻힌 채로 선로 위에 멈춰있는 기차 같다. 그 기차들이 차례로 하나씩 무너져 버렸다. 그 기차들이 모래 속에서 기어 나와 다시 움직이긴 힘들 것 같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기차는 다시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다.

 

 18번 막사


전시 하의 건축물 중에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만한 건물이 있다. 도랑물과 작은 언덕에 둘러싸여 있는 검은 판자 막사다. 폴란드의 평야 위엔 끝없이 펼쳐진 하늘 아레 천장이 낮은 막사가 있다.


18번 막사! 우울한 홍수 위에 떠있는 노아의 작은 방주 속에 모든 창조물이 다 들어있다. 어린이로부터 시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생쥐로부터 정부 고관에 이르기까지 다 있다.


18번 막사. 처음에 우리가 그 막사에 들어섰을 때, 세 줄로 늘어선 텅 빈 침대를 바라보고 말문이 막혀 문 옆에 주저앉았다. 민숭한 벽과 먼지 낀 마루바닥과 커튼도 덧문도 없는 창문을 두리번거리며 둘러보기만 했다.


우리는 배낭을 손에 거머쥔 채 마치 이민을 온 사람처럼 우리를 싣고 떠날 그 작은 방주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시간은 마치 우리 머리 속의 차디찬 침묵을 무정하게 찍어 넘길 듯이 우리의 침묵 위를 성큼성큼 지나갔다. 


갑자기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노벨로 대위의 망치다!”

 

 

      ****************    

 

 

 
이제 이 세상에서 가장 저주받아야 할 도구를 한 가지 회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비트는 렌치와 펜치와 끌과 줄과 나사돌리개와 도끼와 쇠뭉치를 혼합한 악랄한 도구였다. 광물계의 인신우두(人身牛頭)의 기능은 그 근처에도 못 간다. 


그러므로 그 망치는 민족의 순수성을 부르짖는 데 크게 공헌하고 있는 잡지에서도 욕먹을 만한 망치였다. “노벨로 대위의    망치!”


이것은 가장 혐오감을 일으키는 미국 실용주의와 가장 저질적으로 추상적 이탈을 한 피카소 학파를 혼합한 물질이다. 이 지겨운 도구는 원래 초원지대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 망치 주인은 재산을 몽땅 잃었으나, 인간사를 자주 통제하는 기적적인 불의(不義) 덕분에 망치는 구제되었다. 지옥의 18번째의 원성으로 바꾸어 놓은 고함소리였다. 
우리는 모두 80명이었는데 개인의 사물과 장비를 정돈할 못과 압정이 수백 개씩 필요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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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yoon
윤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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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5
나의 비밀일기(6)

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유니스 윤경남 옮김

 


(죠반니노 과레스끼 삽화-수용소 안에서)

 

 

(지난 호에 이어)
“종탑에 달런 저 종들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것입니다.” 안내자가 우리에게 말했다.


“그런데 왜 종은 울리지 않나요?”


“독일이 점령한 그날부터 종들은 일제히 침묵을 지켜왔지요. 폴란드가 해방이 될 때까지 다시는 울리지 않을 겁니다.” 안내인은 숨을 죽인 채 말했다.


우리 포로들이 시가지로 다시 열 지어 내려갈 때 나는 그 종들이 벙어리가 된 4년이란 세월을 생각해 보았다. 폴란드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소리를 나는 다시 들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10월 31일 독일인들이 우리에게 나누어준 러시아 포로들의 코트는 대부분 가슴이나 등에 꿰맨 조각이 있다. 그 작고 둥근 조각은 총알이 들어가고 영혼이 빠져 나온 구멍을 메우고 있었다. 


내 코트는 바로 가슴 위에 그 헝겊 조각을 대고 있다. 튼튼한 헝겊으로 단단히 꿰매놓았다. 그런데 바람 없고 햇빛이 따뜻한 날씨인데도 찬 공기가 그 헝겊조각으로 스며들고 있다.

 

 

나의 후손에게 주는 두 번째 편지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첫 번째 편지에서 나는 어느 화창한 아침에 어떻게 체스토효바(Czestochowa)에 있는 노드 카젠느(Nord-kaserne) 강이 보이는 뜰에 서있게 되었나 네게 설명해 주었으니, 오늘은 내가 무엇을 타고 그곳에 갔는지 말해주겠다.


1943년 9월 8일 저녁이었다. 라디오 방송이 갑자기 이젠 모든 것이 끝났다고 방송하더구나. 다음날 아침에야 그게 사실이었음을 알았단다. 같은 막사에서 잠이 깨었는데, 우리를 감시하는 경비병이 종전과 달라졌다. 군복도, 무기도, 어쩌면 국 적까지도 말이다. 다시 말해서 독일은 항복한 것이다.


“그러면 영웅적인 최후 방어는 어떻게 된 건가요?”하고 너는 묻겠지. 얘야, 아주 기막히게 극적인 이야기를 하나 해주마.


우리는 포위되어 숨을 죽이고 공격할 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트럭 앞에 25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있었지. 병참부에 보냈던 상병이 돌아오기에 물었다. “수류탄을 몇 개나 가져왔냐?”


“하나도 못 가져왔습니다. 정식으로 청구하지 않으면 핀 한 개도 내줄 수 없다고 소령께서 말했습니다. 곤란한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답니다.” 상병이 말했다.


“좋아! 그럼 소총 탄약통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이 몇 개인가?”하고 나는 물었다.


“한 사람 앞에 한 줄은 돌아갑니다.”


“됐다! 우린 아껴서 써야만 한다. 저들 눈의 흰자위만 겨냥하라!” 나는 소리쳐 말했다.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저들은 탱크 속에 있는걸요.” 다른 병사가 내게 말했다.


“그럼 탱크를 겨냥해라! 그밖에 다른 말이 필요한가? ”

 

     * *

 

지나온 이야기는 이쯤 해두자. 자세한 설명은 모두 끝났지만 우리의 고통은 이제부터 시작임을 알아다오. 정오가 되자 사병들은 도시 외곽으로 이동되고, 장교들은 식당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커다란 독일 탱크가 우리 눈앞에서 그 식당을 덮치고난 다음엔 보병들이 부엌까지 몰려 들어왔다. 우리는 잠이 덜 깬 상태에서도 이층에 있는 클럽 회원 방으로 피신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날 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셈이다. 내 발뒤꿈치에서 찰칵 소리가 나기를 기다리던 그 대령은 소령과 나란히 당구대 위에 사지를 뻗은 채 누워 있었다. 불쌍한 대령 같으니라고! 


대령이 잠잘 때 탄호세에 나오는 행진곡에 맞추어 코를 골던 생각이 나는구나. 과거의 위대한 우리 동맹국 천재 음악가에게 밤의 찬사를 보낸 일은 용감하고 의미 있는 행동이었지.


나는 그랜드피아노 위에서 잠을 자며, “두 명의 근위병”이라는 하이네(Heine) 의 시(詩)를 밤새도록 꿈꾸었다. 다음날 S.S.(친위대) 장교와 활발한 토론이 있은 다음, 우리는 써타렐(Citadel)로 이동하게 되었다.


“씨타텔요? 무얼 하는 곳인데요? ”하고 너는 묻겠지. 자, 이런 걸 상상해 보렴. 옛날에 어떤 건축가가 군인의 도피처와 무기 저장고를 만들려고 요새화된 설계도를 고안해 놓았단다. 고도의 기능과 상식을 발휘하려고 그는 무척 고심했단다. 그런데 다음에 일어난 일들을 또 상상해봐라. 그 건축가가 먼 곳을 다녀와야 했는데, 그가 집을 비운 사이에 그의 애견이 그 청사진을 발기발기 찢어 놓았단다. 


하녀는 그 재난을 감추기 위해 찢어진 조각들을 주워 모아 아무렇게나 붙여 놓았지. 건축가가 돌아와 일이 돌아간 꼴을 보며 하는 말, “정말 아무 상관 없다고.” 하드란다. 그는 그 청사진을 국방성에 보냈는데, 국방성은 그 설계도를 열렬히 지지해 주어 인정을 받고 계약단계까지 갔다. 그리고는 준공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Citadel(성채)이다. 이제 너는 그 성채를 구경한다든가 군사 시설을 돌아보게 되면, 왜 그렇게 지어 놓았는지 이유와 목적을 알게 될 것이다. 너는 위쪽에 문이 달란 삼각형의 피라미드 방을 지나게 될 것이며, 천장에 붙은 세면실 달린 화장실, 긴 낭하로 열려있는 발코니, 빈 공간과 연결되어 3층까지 서 있는 높은 문짝, 굴뚝 속에 박혀있는 수도 파이프 같은 것들을 보게 될 것이다.


1932년 8월쯤 나는 P성채에서 이상한 복장에 긴 턱수염을 늘어뜨린 군인을 만났단다. “몇 년도에 입대했습니까? ”하고 그에게 물었다.


“1899년이죠.” 그가 대답했다.


“아직 복무 중이오? ”


 “아닙니다. 1 904년에 제대했지만요 나가는 길을 찾을 수가 있어야지요…”


A성채도 이와 똑같단다. 그러나 운 좋게도 우리는 길을 잃기 전에, 이삼 일 정도 지나서 라게르(Lager) 수용소로 끌려갔단다. 그곳이 훨씬 나은 곳이지. 


그렇다, 사랑하는 아들아! 하느님이 모든 성채로부터 너를 보호해 주시기 바란다. 첫째, 성채 벽은 모두가 무섭게 교육적이란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벽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있다.


“모험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리라! 믿으라, 순종하라, 투쟁하라! 옳건 그르건, 나의 조국이여! 보다 높은 목표를 향하여!”


조그마한 칸막이로 나뉘어진 아름다운 지점에 이르자 큰 글자로 이렇게 쓰여있는 게 보였다. 


“달 • 려 • 라 !” 비상사태에 이르렀을 때의 긴박함을 생각하면서 그 이상 물어볼 수도 없었다.


A성채 안에서 나는 재미있는 일을 많이 목격하게 되었지, 예를 들면 독일산 말을 처음 사귀게 된 일이었다. 그 말은 위엄이 있고 호전적이었다. 큰 눈망울과 의기양양한 태도는 시대의 중요성과 자기에게 배당된 일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범 유럽적으로 말들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그의 할 일처럼 보였다. 말은 쇠와 주철로 만든 특수한 작은 마차에다가 복잡한 마구가 달려있었다. 그 마차는 여러 개의 바퀴와 지렛대와 페달과 손발로 움직이는 브레이크가 장치되어 있어서, 보는 사람들은 그 마차가 액셀레이터와 클러치와 기어까지 있으리라고 생각할 지경이었다. 


마구를 보고 놀란 것은, 구멍에 매여있는 수많은 가죽 끈마다 개별적인 번호가 붙어있다는 사실이었다. 비천한 말을 기계화한 것이 성공한 사례처럼 보였다. 말의 허리통은 너무 바짝 조였기 때문에 발레리나의 허리처럼 가늘었다. 


반면에 엉덩이 띠는 7~8인치씩 길어서 꼬리 밑에 늘어져 있었다. 허리 띠는 27 번 구멍에, 엉덩이 띠는 1 2번 구멍에 매두는 것이 독일식 규정임이 틀림없었다. 그 착한 동물은 그런 일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의 어미 말이 그런 표준에 맞추어 생산하지 못한 것을 약간 부끄러워 하는 듯이 보였다.


만일 말의 하느님조차 그에게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면, 그 말은 자기 허리 치수를 줄이고 꼬리는 엉덩이에 닿도록 6인치 낮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이 틀림 없었다.

 


    * *

 

내가 A성채에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는가 하는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느 날엔가 밖으로 나와 알프스 북쪽으로 가는 기차를 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때 나의 낡은 자전거도 마지막 이별을 고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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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yoon
윤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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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4
나의 비밀일기(5)

 
 
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유니스 윤경남 옮김

 

검은 마돈나


지금 나는 전염병으로 폐허가 된 어떤 시가지를 걷고 있는 듯하다. 거리엔 마치 누가 쫓아오는 듯 급히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만 뜨문뜨문 보일 뿐이다. 그 사람들은 게슈타포 출신의 대위가 앞장서고 의심 많은 통역관이 뒤따르는 우리들, 열 명의 전쟁 포로들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지나가는구나. 그 시선은 우리를 재빠르게 지나쳤지만 통역관도 알아채지 못하는 웅변이 들어있었다.


1939년 이전의 체스토초바(Czestochowa) 시 인구는 18만 명 이었다. 독일군이 들어온 지 이 삼일 후에 그 중의 5만 명이 죽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거나 했다. 넓고 텅 빈 광장은 마치 사람이나 집이나 모두 그곳에서 추방되어 버린 듯이 허망해 보였다. 


남아 있는 건물들은 유령이 나올 듯 썰렁했고, 겉모습은 지난 몇 해 동안 고통을 받아온 비극을 떠올리고 있었다. 거리는 어수선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고, 사람들은 반쯤 내린 덧문 사이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상점은 모두 문을 닫았고, 아직 잠그지 않은 진열장엔 통조림과 생산품 상자를 진열해 놓았다.


“Patria Bar…”라는 이탈리아 글자가 황폐한 카페 입구에 붙어있는데, 마치 수많은 외국인 가운데서 낯익은 모습을 하나 발견했을 때 떠오르는 아픔으로 가슴에 와 닿았다.


거리는 머리칼 한 오리 없는 내 머리 위로 윙윙거리는 바람결에 쓸려가 버린 듯 깨끗했다. 나는 마치 마지막으로 좋은 옷을 입고 거리를 누비면서, 보석상점을 기웃거리고 카페에 들어가 아는 사람을 찾으며, 이 세상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거리를 배회하는 자포자기한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뒤에 있는 출입문이 곧 닫치리라는 것과 그렇게 되면 내가 한 달 동안 꼬박 굶게 되리라는 사실을 내가 잠깐 잊었을 때뿐이었다.


지성소(至聖所)는 언덕 꼭대기에 있다. 우리가 넓은 입구에 이르자 게슈타포 대위는 걸음을 멈추고 통역관에게 말했다. 통역관은 곧 우리에게 통역해 주었다.


“여러분이 보고 있는 저 언덕은 해발 400피트가 더 된다고 대위가 말한다.” 단지 그것만이 알아두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한 듯 말했다. 결국 해발이란, 실질적이고 수학적인 것이며 예술적이라거나 역사적 이해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이 바로 독일인의 관점인 것이다.


우리가 지성소 입구에 이르자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얀내인과 마주쳤다. 죄수 중 한 명이 그의 통역관 노릇을 하고 있었다. 지성소는 아주 좋은 종탑으로 둘러싼 건물들이 잔뜩 밀접해 있었다. 원래 그곳은 성 안토니오 원장의 교단에 속해 있는 수도원이었는데 후에 도미닉회 교단과 병합했다. 


1200년 이후에 그 수도원이 유명한 성 루가의 마돈나를 소유하게 되자 수 많은 순례자들의 목표가 되었으며, 작은 예배당이 신성한 바실리카로 변모하게 되었다.


수도원의 부원장과 폴란드의 영주들이 그 본채에다 새 건물을 자주 덧붙여 짓는 바람에 그 수도원은 건축 백과사전이 될 지경이었다. 높이 솟은 검은 대리석 종탑조차 어떤 건축 설계자가 점점 더 뾰족하게 그리다가 나중에는 “몇 개만 더 그리자. 성 베드로의 발치에 닿으려면 아직 멀었어.” 하면서 설계도를 그린 듯이 보였다.


간단히 말해서 직경 50야드 되는 대좌 위엔 세계에서 가장 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14개의 조각상에 둘러싸여 큰 혼잡을 빚고 말았다. 내부에는 진짜 대리석과 모조 대리석이 너무나 많아서 방문객들은 전면의 넓은 광장을 걸을 때 보이는 검고 흰 자갈 돌들이 페인트 칠한 나무조각인지 정말 돌멩이인지 알고 싶어 발 뒤꿈치로 그것을 밟고 싶은 유혹을 느낄 정도다.


어떤 곳에서 보면 그 지성소가 성채같이 보였다. 길고 검은 장화가 수도승이 입고 있는 흰 성의(聖衣) 밑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군인으로 위장한 모습을 풍기고 있다. 안내인은 실제로 담 벽에 박혀있는 포탄 자국을 손으로 가리켰다.


곳곳에 야자나무가 서 있고, 광장에도 층계에도 난간 벽과 첨탑 위에도 뒷발을 치켜든 두 마리의 사자와 빵 조각을 입에 문 갈가마귀가 그려져 있다. 이것은 황야에서 일생을 마친 성 안토니오의 전설과 관계가 있다. 그 갈가마귀는 매일같이 그 황야의 성자에게 빵 반 쪽을 날라다 주었는데, 그 후 성자가 일 년에 한 번씩 그곳을 방문할 때도 빵 한 개를 주었다. 성자가 죽자 두 마리의 사자가 그들의 발톱으로 무덤을 팠다고 한다. 


안내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여 말랬다. “원래 그 새는 독수리였답니다. 러시아인이 와서 독수리를 갈가마귀로 바꿔 놓았지요. 그 다음엔 독일 사람이 들어와 그 빵을 뺏어갔고요…”


 광장에서 내려다 보면 시가지 전체가 보이고, 그 너머로는 한 때 수도원의 소유였던 큰 숲이 멀리 지평선까지 펼쳐있다. 


“검은 마돈나의 축제일을 기념하며 순례여행 하는 동안, 큰 뜰에선 하루에 약 5 만 명의 고해성사와 성찬식을 준비한답니다. 이동식 유리문 뒤로 떼지어 서 있는 수십 만의 신자들을 위해 미사가 진행되지요. 물론 대형 스피커가 장치되어 있지요…”


안내자는 계속해서 단조로운 말투로, 여기 있는 모든 시설물의 가격과 계약자의 이름을 대면서 떠들었다. 언덕 기슭을 내려다보니 수십만 명의 폴란드인들이 판례대로 모여들고 있었다. 오로지 사람답게 보이는 사람은 긴 장화를 신고 허둥대는 여인 한 사람뿐이었다. 그 여인이 나타남으로써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텅 빈 공간이 주는 고독감과 절망감이 모두 흩어져 없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바살리카 회당에서 매일 거행되는 의식에 참여할 시간이 되었다. 체스토효바 (Czestochowa)의 검은 마돈나는 성모 마리아의 초상화로 알려지고 있다. 이 그림은, 그리스도의 수난 중 마리아가 그 위에 올라서서 울었던 널빤지에 성 루카가 실물 그대로 그려 넣은 최초의 마리아 초상화인 것이다. 


이 널빤지는 굉장히 흥미 있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에 320년간 보존 되었다가 콘스탄티노블에서 400년간, 헝가리에서 400년간, 그 후론 체스토효바(Cze­ stochowa)에 간직되고 있다.


1430년엔 보혜미아 출신 후스(Huss- 註: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자. 1369~1415) 신봉자들에게 도난 당하여 잘리고, 포악한 인간의 총에 맞은 구멍자리까지 나있 다. 1717년에 교황 클레벤트 10세가 성화(聖化)시킨 이래로 오늘날까지 한 예배당에 잘 모셔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형상(形象)은 제단 위에 잘 안치되어 있으며 묵직하고 단단한 황금 판으로 덮여 무게는 1600 파운드가 된다. 매일 오후 5시 15분 전이면 짧은 의식이 있고 그 동안 대중들이 그 형상(形象)을 볼 수 있도록 앞에 친 커튼이 위로 올라간다. 이 때 패로시(Perosi)가 1909년 이 수도원에 왔다가 작곡한 찬송가와 반주가 흘러나온다.


 공회당에 들어서자 올간 연주가 들리는 가운데, 반짝이는 마치 동화처럼 제단 앞에 서있는 한 떼의 부녀자들 사이에 우리도 끼게 되었다. 더러운 것과 절망의 분비물이나 내보내고, 그 모든 낱말은 울음뿐이고 모든 명령은 위협뿐인 그런 환경에서 한 달을 보낸 다음, 갑작스럽게 이처럼 조용하고 반짝이는 황금과 짜릿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에 와 있다니!


나는 문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가 다시 앞으로 걸어나갔다. 갑자기 누더기로 덮인 내 몸의 육체에서 벗어난 듯 홀가분함을 느꼈다. 제단 앞의 황금판이 서서히 올라가고, 반짝이는 황금의 배경 때문에 더욱 검게 보이는 기적의 형상(形象)은 주위의 대조로 인해 더욱 신비롭고 매혹적이다. 


군중 가운데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마치 폴란드의 온 영혼을 나타내듯이, 여러 세기를 억압에 익숙해온 국민의 슬픔을 소리쳐 부르는 듯한 노래 소리가. 시간이 되어 황금판이 내려지자, 마음을 혼란케 하는 정열적인 트럼펫의 팡파레가 울려 퍼졌다.


“트럼펫 부는 사람 중에 아주 잘 부는 사람이 몇 명 빠져서 아무렇게나 불고 있는 겁니다.” 안내자가 설명했다. 바로 그 점이었다. 절망에 찬 정열의 곡들은 음이 맞지 않게 되어 있다. 그래도 좋다. 


그러나 안내자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게 한 가지 있다. 폴란드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몸짓과 억양이 정열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체스토효바(Czestochowa)를 둘러싼 어둡고 푸른 녹색의 숲에 황혼이 덮였다. 지성소(至聖所) 앞에 있는 광장에서 우리는 창백한 달빛이 저녁의 아름다운 풍경을 준비하는 게 보였고 웬편엔 철조망 울타리 주위에 감시탑이 서있고 노드 카젠(Nord-Kaserne) 강이 보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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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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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2
나의 비밀일기(4)

  

(지난 호에 이어)


“아내여! 매일 밤 나의 사념은 이 철조망을 뛰어 넘는다오. 생각은 얼굴이 없기 때문에 당신이 그 모습을 확실하게 그려낼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오. 생각은 바람 속에 이는 한낱 광풍 같은 것, 철조망을 뛰어넘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오. 이 죠만니노가 고요하고 추운 겨울 밤에 꿈처럼 밝게, 바람처럼 넘나드는 모습을 그려보시오.” -본문 중에서

 

나의 후손에게 주는 첫 번째 편지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인류는 방금 살아온 것과 똑같은 고통을 겪고 나면, 미래에 닥칠 전쟁을 피하고저 갈망하게 된단다. 그렇게 되면 현재의 재앙은 우려가 겪는 최후의 고통이 될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 또한 언젠가는 어느 육군 막사로 출두하라는 소집영장을 편지함에서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군대 막사에서 너는 네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네 이웃에게도 똑같이 해를 끼칠 도구와 장비를 정비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오랜 영고성쇠를 지낸 다음 불행했던 너의 조상처럼 강제수용소에서 너의 인생을 마칠지도 모른다. 네 머리 위의 감시 탑에 서있는 경비병이 영국인? 러시아인? 프랑스인? 독일인? 혹은 이탈리아인이 될지 정확하게 말해줄 순 없구나. 국적이 어디건 네가 수용소를 탈출하려고만 하면 네 등에 총을 쏘려 하겠지. 너에게 닥칠 일은 이것뿐이란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내 경험에 비추어, 왜? 그리고 어떻게? 네가 철조망에 갇힐지도 모른다는 것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내가 말끔한 포병 중위 제복을 입고 막사 연병장에 서있을 때, 차렷! 하는 나팔소리와 함께 아주 굉장한 일이 벌어졌다. 드디어 내 발뒤꿈치에서 찰칵하며 맞부딪쳐 울리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이 사건이 왜 중요한가를 알려면, 이른바 나의 “군인답지 못한 태도”에 대한 길고도 서러운 이야기부터 들어야 한다.


 11월    어느 음산한 날이었다. 나는 강제 징집영장을 가지고 신고를 하기 위하여 이탈리아에서 가장 안개가 짙게 끼는 곳으로 가 헤매던 끝에 군대 막사를 간신히 찾아냈다.


막사에 도착하자 꽤 높은 자리에 있는 듯한 사람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일부터 당신은 지금 편성중인 제 6고사포 부대의 중대장이 됩니다.”


나는 과거에 야전포병이었으므로 대공포 와는 관계가 없음을 그에게 누누이 설명했다. “상관없소!” 그는 내게 공책과 서류를 건네주고 있는 하사 판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는 내게 흔해빠진 펜 한 자루를 건네주며 엄숙하게 말했다. “이 보급품들로 한 달을 사용하도록 하오. 더 필요하다고 청하는 일이 없도록!”


그는 출입구에서 나를 배웅하며 장부와 명단을 곧 작성하라고 충성스럽게 충고해 주었다.


“그 물품들은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이니까.” 그는 다시 다짐했다. 나는 그의 충고에 고맙다고 말하고 내가 머물 곳은 어디인가 물었다. 


“물론 중대 사무실이지. 각 부대 단위로 사무실이 있으니까.”


“죄송하지만 그건 어디에 있나요?”


“이 풋내기 장교가 나를 미치게 만드는군! 그런 질문이 어디있냐? 여기저기 찾아 다니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게. 중대 사무실이 될만한 장소를 찾게 될 테니까.”


“하지만 저는…”


“머리를 써요!” 


그는 내가 나가자 문을 꽝 닫으며 소리쳤다. 그 바람에 펜이 바닥에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그 펜을 발로 밟았다. 


“한 달치 보급품이여, 안녕!” 나는 그 펜에게 우울한 인사말을 던졌다.


나는 묵직한 공책과 서류를 들고 휘청거리며 막사 주변을 맴돌았다. 중대 사무실로 적합한 한 장소를 구하려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물었으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병참부에 있는 한 사병에게 20리라를 슬쩍 접어주어도 허사였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끝에 한 젊은이를 만났는데, 그는 미래의 나의 고사포 부대에 충성을 다하고 중대 사무원으로 봉사해 줄 것을 스스로 다짐해 주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를 장부에 등록하고 서류뭉치를 그에게 넘겨준 다음에 막사를 함께 찾아 나섰다. 결국 나의 참모는 변동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새로 구한 그 신병을 예인선에 태우고 나는 일단 막사에서 나오기로 결심했다.


“우리 사무실은 여기다. 자네는 직원으로 쓸 부하를 한 명 골라서 조용히 일을 시작하게. 난 호텔로 옮길 테니까.” 


그날 낮에 세든 방으로 돌아와 신병에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가 일을 쉽게 처리하도록 75개 가량의 팩스에 사인을 해주었다. 징집된 병사들이 왔다 갔다 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지레 짐작하게 되었고, 내가 들어있는 하숙집도 명성이 떨어져갔다.

 

그 외엔 모든 일이 막사 구역 내에서 나의 수색 임무가 끝날 동안 잘 진행되어 갔다. 그러나 “군인답지 못하다”는 딱지가 늘 붙어 다녔고, 나는 늘 의혹의 대상이 되어갔다.


이와 비슷한 작은 일화들이 더러 있었는데, 그것은 내 평판을 더 망쳐놓았다. 그로 인해 파탄이 오기 시작한 최후의 사소한 일은 “커피 유죄”였다. 어느 날 아침이었는데 나의 부하 60명이 부엌에서 얼어난 소동 덕분에 커피를 한 방울도 못 마시게 되었다고 내게 알려왔다. 나는 그들을 일렬로 세워 막사 밖으로 행진해 나가서 가까운데 있는 네 군데 카페로 분산시키고 내 호주머니를 털어 그들을 대접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상관들이 나의 그런 행동을    회의적으로 보게 되어 “군인답지 못한 태도”란 일화가    생겨났고, 그 일은 내게 너무나 큰 피해를    입혀 고사포 부대 중대장 직책마저 박탈당했다.


내가 전방에 있었더라면 그 유명한 대공 고사포 무기를 보았을 텐데, 나는 후방에 남아있어야 할 운명이었다. 고사포 부대 일원으로써 그것은 지금 생각해도 유감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내 관심은 발뒤꿈치를 찰각 붙이는 일과 관련되는 또 다른 고통으로 어지러워 있었다.


대령들도 꿈을 꾸는지? 그렇다. 대령들도 일반 사람이나 예비역 장교들처럼 꿈을 꾼다. 어쩌면 그들의 꿈은 모두가 똑같을 것이다. 군대의 규칙은 꿈과는 상관이 없으므로 대부분의 고참 상관들은 천사의 꿈을 꾼다. 그 천사들은 푸른 날개와 금발을 달고 시인과 젊은 아가씨의 꿈을 찾아 지상에 살포시 내려온다. 


그 천사가 어느 대령의 발치에 내려앉을 때만 그 대령은 발뒤꿈치에서 찰칵 소리 내 식사를 계속했다. 고개 숙인 사람들 머리 위로 빨갛게 타오르는 불빛 문자가 “군인답지 못하다”고 써있는 것같이 보였다. 


 나중에는 찰각 소리를 낼 수 있는 육군중위와 타협을 보았다. 그는 문가에 앉아 있다가 내가 들어서면 찰칵 소리를 내주기로 했다. 나는 그것을 작위수여작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것도 꼭 두 번밖에 못했다. 첫 번엔 내가 차렷한 다음에 찰칵 소리가 들려왔고, 두 번째는 내가 방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을 때 이미 소리가 나버린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내게서 본래 나던 소리인 퍽! 소리로 되돌아갔다. 대령은 내가 그의 가슴에 핀이라도 찌르는 듯이 몹시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퍽! 퍽! 몇 번이나 나는 그 비참한 소리를 들어야 했는지!


어느 가을날 아침이었다. 내가 막사 뜰에 서서 나팔소리에 차렷 자세를 취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 내 발뒤꿈치에서 찰칵 소리가 난 것이다. “드디어 들려 왔구나!” 나는 의기양양하여 소리질렀다. 


그런데 나는 내 발을 내려다 보고 소리가 들려온 이유를 알았다. 한껏 부푼 자만심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가 신고 있는 것은 정규군인의 장화가 아니라 바닥이 3인치나 높은 나막신이었다. 그때, 나는 전쟁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이것이 내 이야기의 전부이다. 다음엔 내가 어떻게 해서 폴란드 막사의 중앙 뜰에 들어서게 되었는지 다음에 얘기해 주마. 그 동안 너의 어머니와 할머님과 누이에게 안부를 전해다오. 학교에서 공부 열심히 하고, 6865까지 세는 것을 배워두어라. 그 숫자는 희생적으로 헌신한 너의 아버지의 수용소 번호란다.  - 아빠로 부터

 

검은 마돈나


지금 나는 전염병으로 폐허가 된 어떤 시가지를 걷고 있는 듯하다. 거리엔 마치 누가 쫓아오는 듯 급히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만 뜨문뜨문 보일 뿐이다. 그 사람들은 게슈타포 출신의 대위가 앞장서고 의심 많은 통역관이 뒤따르는 우리들, 열 명의 전쟁 포로들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지나가는구나. 그 시선은 우리를 재빠르게 지나쳤지만 통역관도 알아채지 못하는 웅변이 들어있었다.


1939년 이전의 체스토초바(Czestochowa) 시 인구는 18만 명 이었다. 독일군이 들어온 지 이 삼일 후에 그 중의 5만 명이 죽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거나 했다. 넓고 텅 빈 광장은 마치 사람이나 집이나 모두 그곳에서 추방되어 버린 듯이 허망해 보였다. 


남아 있는 건물들은 유령이 나올 듯 썰렁했고, 겉모습은 지난 몇 해 동안 고통을 받아온 비극을 떠올리고 있었다. 거리는 어수선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고, 사람들은 반쯤 내린 덧문 사이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상점은 모두 문을 닫았고, 아직 잠그지 않은 진열장엔 통조림과 생산품 상자를 진열해 놓았다.


“Patria Bar…”라는 이탈리아 글자가 황폐한 카페 입구에 붙어있는데, 마치 수많은 외국인 가운데서 낯익은 모습을 하나 발견했을 때 떠오르는 아픔으로 가슴에 와 닿았다.
거리는 머리칼 한 오리 없는 내 머리 위로 윙윙거리는 바람결에 쓸려가 버린 듯 깨끗했다. (다음 호에 계속)

 


 
 

 

 

(옮긴이 주) 폴란드 쳉스토호바 수도원의 검은 성모님 상은 약 600년 전부터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누가복음서 저자인 누가 성인이 성 가정(예수님과 그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의 집)을 방문했을 때, 키프로스 산 식탁 위에다 성모 마리아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한다. 그때 마리아가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주의 깊게 들은 것을, 누가 복음에 기록했다는 설이 있다. 


목판 성화인 검은 성모님 상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했다는 헬레나 왕비가 예루살렘에서 발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벨즈를 거쳐 1382년 8월에 쳉스토호바의 야스나고라 수도원에 안치했다고 한다. 그 후 이곳에서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고 한다. 


죠반니노 과레스끼가 1942년~1945년 사이에 전쟁포로로 폴란드 수용소에 있을 때 이곳을 방문한다. ( <나의 비밀일기> ‘검은 마돈나, 9월 20일 일기’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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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9
나의 비밀일기(3)

유니스 윤 / 윤경남 

(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email protected]

 

 

 

 

(지난 호에 이어)
우리 포로들은 짐을 모두 빼앗긴 다음 짐차에 실려 벌레가 우글거리는 라게르(Lager) 수용소에 짐짝처럼 몸을 던졌다. 우리 주위에 있는 공동묘지 속에는 우리 선임자들의 시체가 가득 묻혀 있었다.


곧 외부세계는 잊혀졌고, 국제 적십자사는 그들의 헌장에 따라 “군사적으로 억류된 자들”인 우리 신분에 맞는 규정이 따로 없어 속수무책이었다. 서로 대적 관계의 두 군사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똑같이 조국에 해를 끼치고 있었다. 


그들 중 그라지아니(Graziani) 는 우리를 위해 목청을 높여 한마디 해 줄만 하건만 널리 알려진 우리의 적이었으며, 바도글리오(Badoglio)는 아예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들은 모두 정치하는 일에 시간을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물질적인 도움이 아니라 용기를 주는 격려의 한마디였다. 그러나 우리는 업신여기는 소리나 들었고 아니면 관심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 


우리는 그 당시 이탈리안의 창의력을 발휘한 라디오를 만들어 냈다. 그 라디오에서는 여러 나라 말로 방송되는 수천 개의 낱말이 흘러나왔지만, 우리 말을 하는 방송은 하나도 듣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남부에선 정치에 눈먼 자들이 아첨을 떨고 있었고, 북부엔 정치에 현혹된 풋내기들이 서로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가끔 우리 조국에서 온 몇 사람의 대표들이 철조망 밖에 와서 몇 마디 던지 고 가곤 했다. 그것은 언제나 똑같은 내용이었다. 즉 우리가 의무를 다하고 명예를 얻는 길은, 자발적인 옥중생활이 아니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 고향에는 수많은 우리 동포들이 지하에서 혹은 연합군 수용소에서 우리가 가 그들을 총살하도록 기다리는 곳이었다. 우리는 점점 더 비참하게 소외 당했지만 짐승같이 굴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문명을 일으켜 세웠다. 뉴스방송, 강연, 예배, 대학강좌, 연극, 음악회, 전시회, 운 동 시합, 공예, 도서관, 지방의회, 라디오 청취센터, 상품거래소, 구직광고 그리고 제조와 무역을 취급하는 기업체 등을 조직해갔다.


이미 말했듯이 지위나 명성은 좋건 나쁘건 바깥 세계에 버려둔 채 우리는 모두 하나같이 갑작스레 벌거숭이가 된 셈이다. 남은 것은 내면의 재질뿐이라서 이에 따라 타고난 대로 주고 받을 뿐이었다.


이 새로운 세계에선 사람들이 자신의 내적 가치에 따라서 평가 받는 단일체를 이루고 있었다. 라게르 수용소 생활은 언제 어느 곳이나 똑같았다. 길게 펼쳐있는 모래사장, 똑같이 생긴 수용소 간이 막사들, 언제나 느끼는 황폐함 등이 그러했다. 


그러나 거기엔 문명인들이 사는데 필요한 것이 다 있었다. 콧노래를 부르는 히트송도 있었고 아주 세련된 그 노래의 가사와 음악은 우리의 감정을 아주 잘 반영하고 있었다.


우리는 짐승처럼 살지 않았다.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우리는 민주도시를 세웠다. 만일 과거에 포로였던 그들이 지금의 일상생활에 충격을 받거나 세상을 멀리하고 있다면, 그들이 갇혀있을 때 마음 속에 품었던 민주주의와 현실의 민주주의의 이미지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눈 앞에 보이는 현실의 민주주의는 음모가 횡행하고 있으며, 과거의 해적들과 새로운 해적들이 옛 해적선의 키를 잡고 있음으로써 이에 실망하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 가장 정직했던 자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된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사람들에게도 나는 이 글을 써 보낸다. 6865 번의 음성은, 자전거 핸들 같은 콧수염 밑으로 지금도 똑같은 소리를 내어 말하고 있다. 덧붙일 것도 없는 말을. 


나는 원래의 내 일기장은 내다버렸다. 왜냐하면 라게르에 있던 내 동료들이 찬성하는 도장을 찍어주지 않는 수용소 생활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다름없는 민주주의 신봉자다. 내 얼굴을 오르내리던 벼룩도 이도 빈대도 쥐도 지금은 없다. 게걸스레 먹으려던 허기 대신에 미지근한 식욕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내 주머니 속엔 내가 좋아하는 온갖 담배가 다 들어있다. 그래도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민주주의 신봉자다. 내 동지들이 안정하지 않는 이야기는 인쇄되지 않도록 하련다. 내 동지란 현존하는 사람만이 아니고 이미 죽은 사람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죽은 사람을 무시해선 안되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처참한 모험을 해보지 못한 독자들에겐 이 글이 어떤 영향을 줄는지 모르겠다. 아마 지루해 할 것이다. 나도 그 당시엔 지루함을 느꼈으니까. 적어도 감옥생활을 익살스럽게 그린 책이 나온다는 건 그들에게 큰 즐거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아무튼 나는 스물세 명의 충실한 내 독자들을 위해 이 책을 준비 하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음에 내가 다시 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더 잘 써 보도록 노력하겠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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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8
나의 비밀일기(2)

 

작가 서문(序文)


 이 “비밀일기”는 너무나 은밀한 것이어서 일기라고 할 수 없을 정도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책의 제목을 부분적으로 고쳐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책에 적대감을 갖게 될지도 모를 어떤 사람의 불안을 덜어주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은 내가 매일같이 생각하고 행동한 것을 기록한 일기가 아니라, 내 자신을 우주의 중심이며 주축으로 여기면서 쓴 보통 문집의 하나다. 나는 실제로 이런 종류의 일기를 만들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2년 동안에 내가 보고 행동했거나 하지 못한 것, 생각은 안 했지만 꼭 생각해 두었어야 할 모든 일들을 적어 놓았다. 


그 결과 많은 자료가 담긴, 이 천 페이지가 넘는 세 권이나 되는 노트를 집에 가지고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곧 타자기에 새 먹지를 갈아 끼우고 내가 적어놓은 주석(註釋)을 판독하고 설명 붙이는 일을 시작했다. 2년 동안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했다.


지루하고 진땀 나는 작업이었지만 마침내 나의 일기는 완성 되었다. 주의 깊게 내용들을 다시 읽고, 다듬고, 알맞은 속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것을 다시 타자로 옮겨 완성한 다음 다시는 꺼내보지 않으려고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작가로서의 내 생애에 가장 현명한 일이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처럼 나도 가장 최근의 큰 혼란 속에 불행하게 말려들었다. 전쟁이 어떻게 되어 갔는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도 없다. 전쟁에 끼어든 사람들은 자기에게 배당된 작전지구 안에서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으므로 전반적인 상항을 알 길이 없다. 


우리가 전쟁에 이기고 있는 것인지, 져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며 나중엔 이겼는지 졌는지 조차도 모르게 된다.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맹자가 되기도 했으므로 외란에 내란이 겹쳤다. 이런 혼란은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남과 북, 동과 서를 서로 갈라놓았다. 


역사가는 다만 정확하고 정직하게 이렇게 쓸 수 있을 뿐이다. “미치광이 세상에선 미치광이가 미치광이를 정복한다.”라고. 왜냐하면 이쪽이 저쪽보다 더 미쳐있다면 저쪽 또한 이쪽보다 더 미쳐있기 때문이다.


전쟁에 휘말려 든 나도 이탈리아 국민으로서 처음엔 독일인의 동맹자였으나 나중엔 그들의 포로가 되었다. 1943년 미국은 내 집을 폭격했고, 1945년엔 나를 감옥에서 풀어내주며 레이션 깡통을 나눠주었다. 이것이 내 이야기의 전부다. 


나는 바다 위에 떠있는 귤 껍질만큼이나 힘이 없었다. 가슴에 훈장을 달고 나타나지도 못했다. 하지만 나는 승리자로 나타났다. 왜냐하면 내 영혼에 어떠한 증오심도 품지 않고 전쟁의 소용돌이를 헤쳐 나왔으며, 값진 친구인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내가 지나온 이야기는 정확하게 말하면 이러하다. 1943년 9월 어느 날, 나는 다른 장교들과 한 무리가 되어 폴란드의 어느 포로수용소에 끌려온 것을 알게 되었고, 수용소는 그 후 여러 번 바뀌었다. 그러나 이야기의 줄거리는 달라지지 않았다. 


자세히 말해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 이 마지막 전쟁이나 그 이전의 싸움터에서 포로가 되지 않았던 사람도 다음 전쟁에선 포로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도 없다면 이전에 선대(先代)에서 그런 경험을 했거나 후대(後代)에서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니면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형제나 천구에게서라도 듣게 된다.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재미있었던 일은, 내가 수용소 안에서도 뽀 강이 흐르는 낮은 계곡의 에밀리야 읍 토박이 촌사람 노릇을 해왔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를 갈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저들이 나를 죽인대도 난 결단코 죽지 않아!” 그래서 나는 죽지 않았다. 


아마 저들이 나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어찌되었던 나는 죽지 않았다. 육체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살아남아 계속해서 일했다. 내 일기를 남기기 위해 많은 주석(註釋)을 적어두었을 뿐 아니라 부대 기록을 위해서도 매일 적어나갔다.


앞서 말했지만 이것은 너무나 은밀한 책이어서 일기라고 보긴 힘들다. 그러나 이 일기 책은 그 당시의 모습을 여러 각도로 생생하게 그려주고 있으며 원래의 내 수집내용보다 그들의 슬픔과 생각을 더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권위있는’ 자료인 것이다. 나는 이 자료들을 라게르(Lager) 수용소 안에서 생각해 냈고 거기서 쓴 것이다. 거기서 열두 번도 더 읽으며 사람들의 동의를 얻었다. 이 책 속에서 포로수용소 동지들의 인정을 받지 못한 부분은 에필로그뿐이다. 에필로그는 고향에 돌아온 다음, 어느 주간지에서 출판해 주었고 나머지는 깨끗이 정리해 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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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4
‘나의 비밀일기’(My Secret Diary) (1)

 

이번 호부터 ‘신부님, 러시아에 가다’의 작가,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은밀한 수용소 이야기 ‘나의 비밀일기’(My Secret Diary)(옮김 윤경남)를 연재합니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 드립니다. <편집자 주> 


 

 

 

 

 

 

 


 
죠반니노 과레스끼(1908~1968)


이탈리아의 로까비안카의 폰타넬레에서 출생
1935년 2월 마게리따와 결혼
1943년 9월에 군대에 강제 징집
1943년 9월~1945년 4월까지 독일-폴란드-러시아 포로수용소 생활
1946년 <돈 까밀로 시리즈>를 발표하기 시작하여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명성 얻음.
<신부님 나의 신부님>, <신부님과 지옥의 천사>,<신부님, 러시아에가다> 등 다수
1958년 포로수용소 생활 일기 <My Secret Diary> 발표
1968년 체르비아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동지들에게


그 친구는 라게르(Lager) 수용소가 있던 옛 캠프장에 서서, 이젠 새해 아침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생각하며 옛날올 회상하고 있다. 이제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지만,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동지들을 생각하고 있다.


기찻길 위로 유령의 기차가 조용히 달려가고 있다. 이 기차는 나치스의 강제수용소와 포로수용소마다 정거하면서 독일과 폴랜드와 러시아, 그리고 유고슬라비아를 거쳐 철로 위를 달려왔다. 그 기차는 끝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기차는 옥중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을 모두 실어 나르기 때문이다. 


포로들의 영혼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정거하며 그 기차는 이제 이탈리아 반도의 철로 위를 달리고 있다. 50년이나 60년쯤 지나 모든 영혼이 다 모이게 될 때에야 그 기차는 하느님이 뜻하시는 곳이면 어디서나 하늘로 가게 되어있는 선로를 따라 증발 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면 지구상에선 아무도 그 기차를 보지 못하게 되리라.


그 친구는 그 유령의 기차가 어느날엔가 그의 고향마을 정거장에도 서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기차에 올라타면 헤어졌던 옛 동지들을 다시 만나게 되리라. 그래서 그 기차가 도착할 동안 그는 흘러간 세월을 생각하며 위로를 받고 있을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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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8
풍운아 윤치호의 해학(諧謔)과 <우순소리>(2)

 

 

(지난 호에 이어)
 “조선조 시대의 어떤 어진 임금님이 정치를 하던 때의 일입니다. 그 임금님은 마음이 착해서 자나깨나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걱정하여 틈만 있으면 벼락 거동을 잘 다녔는데, 하루는 거동 행차가 동대문 밖을 나서서 어떤 시골 고을에 당도하니, 화광이 충천하고 군중이 아우성을 치는 것이 공기가 매우 수상하였습니다. 거동행차를 멈추게 하고 사정을 알아보게 하니, 그 고을의 군수가 너무 노략질을 하므로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킨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임금님이 크게 노하여 신하를 보고 당장에 그 놈을 잡아오라고 하니, 미구에 광 속에 숨어 있던 군수가 왕의 앞으로 끌려왔습니다.


 ‘여봐라, 군수란 백성의 부모와 같은 것인데, 얼마나 백성을 들볶았기에 이지경이 되었느냐?’ 임금이 꾸짖으니 땅에 엎드려 대죄하고 있던 군수는, ‘예, 죽을 죄를 지었사오나 소인에게는 한 가지 사정이 있사옵니다.’ 


 ‘대체 너의 소위 사정이란 무엇이란 말이냐?’ ‘다름이 아니오라 소인에게는 딸이 다섯이 있사온데, 그 딸 들을 시집 보내려면 돈이 이만저만 들지를 않고 전하가 주시는 국록으로는 태부족이므로 백성의 재물을 조금 긁었더니 그만 이 지경을 당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임금의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그것은 그때 그 임금에게도 딸이 셋이나 있어서 그 딸들을 시집 보낼 생각을 하면 한 나라의 임금인 자기로서도 걱정이 되는데, 하물며 한 작은 고을의 수령쯤으로 딸이 다섯이나 된다니 오죽이나 걱정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왕은 노여움을 푸시고, ‘네 죄는 처벌받아 마땅하나 정상이 딱하니 특히 용서하겠다. 차후에나 조심하여라’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좌옹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소리를 높여서, “그런데 우리 이화학당에는 딸이 수백 명이나 됩니다. 그 애들을 잘 공부시켜서 시집을 보내자면, 돈을 이만저만 긁지 않고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어렵더라도 스와인하트 씨는 다시 한 번 미국에 다녀오셔야 되겠습니다.”


 박수 갈채가 우레같이 일어났다. 얼마나 적절한 비유이고 재미있는 이야기냐? 어떤 선교사 부인은 ‘딸 가진 부모의 걱정은 동서양이 같군요’라고, 연방 그 이야기를 수첩에다 적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날 좌옹의 재치 있는 이야기가 주효했던지, 드디어 스와인하트 씨는 미국으로 다시 가서 많은 기부금을 얻어왔으며, 그 결과로 지금의 이화대학 건물이 그 내부 장식까지 완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두운 세상에서도 기지를 발휘하여 학교의 발전을 도운 멋진 해학의 사례이다. 이 외에 윤치호의 해학적인 역술서 가운데 <우순 소리>가 있다.

 

 

 


 “‘우순소리’는 윤치호가 이솝 우화와 프랑스 작가 라퐁텐의 우화 등을 번역하거나 재창작하여 소개한 책인데, 우화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와 무능하고 부패한 조선 정부를 비판한다. 보통 우화집과 달리 일부 우화의 끝에 엮은이의 촌평을 달아 교육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어미 개구리가 새끼 개구리에게 황소보다 큰 체하려고 자신의 배를 부풀리다가 결국 배가 터져 죽는다는 우화 ‘개구리와 황소’에 대해서는, “강한 나라 칭호와 예식만 흉내 내다가 망한 나라도 있다지”라고 촌평했다. 


 젊은 독수리가 병들어 죽게 되자 어미 독수리에게 명산대찰에 기도하여 병이 낫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어미 독수리가 ‘명산대찰에서는 도둑질만 했는데 그 누가 기도를 들어주겠느냐’고 나무랐다는 우화. 


‘수리의 지각(知覺)’에 대해선, “임금을 속이고 백성을 학대하여 나라를 망하게 해놓고 불공과 산천 기도로 나라 잘 되기를 비는 사람들은 이 독수리 지각만 못하도다”고 비꼬았다. 


 매일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죽여서 배를 가르고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는 우화 ‘금알 낳는 거위’에 대한 촌평에선, “백성을 죽여가며 재산을 한 번에 빼앗다가 필경 재물과 백성과 나라를 다 잃어버린 사람들도 적지 않아”라고 일갈했다. 


‘우순소리’는 당시 언론에 “애국 사상을 일으키며 독립정신을 배양하는 비유 소설”로 여러 차례 광고했고 1910년에도 재간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교과서 검정법’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고 말았다. 

 

 

 


애국가 가사를 지은 윤치호는, 민족운동을 탄압하고자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1911년)의 주모자로 검거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교육에도 힘을 쏟아 실업교육을 강조한 한영서원 초대 원장(1906년10월),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원 교장(1908년), 연희전문학교 교장 등을 맡았다. 윤치호의 ‘우순소리’는 그 당시 일정을 비판하는 청소년 교육 교재로 나온 것이다. 


  윤치호는 한국인 최초로 개신교 찬송가인 <찬미가, 1907>를 펴냈고, <英語文法捷徑>1910, <幼學字聚>1906년 저술, <의회통화규칙>과 <걸리버여행기> 등을 번역했다. 
특히 1883년부터 1943년까지 60년에 걸쳐 쓴 <윤치호 일기>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의 한국 역사를 증언하는 중요한 자료로 많은 역사학자들이 활용하고 있다.

 


윤치호의 <우순소리>는1908년 7월 30일에 대한서림(大韓書林)에서 초판을 발행하고, 1910년5월 10일에 윤치호가 미국 하와이에 정부순찰차 방문했을 때, 하와이 신학국보사(新韓國報社)에서 재발행했다. 


<우순소리>초간과 재간본은 2013년에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미국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UCLA)의 The Charles E. Young Research Library(일명 Research Library)에 소장된 “함호용 일가 자료(980여점)"에서 발견한 자료이다. 


그 자료의 하나인, 세계명작가곡집 <무궁화> (한석원 편, 로스앤젤레스 영원사, 1931년)에는 <애국가>, <국기가>, <혁명가>, <독립선언가>, <대한반도 내 사랑>, 동요 <반달>, <달밤의 고향>, <고향이 그리워서>, <낙화암>, <천하에 제일 좋은 곳>, <님의 창밖에>, <흰나비>, <죽음의 찬미(윤상덕 작사)>, <너와 나> 등 170곡이 수록되어 있다. 특별한 것은, 애국가에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 로 확연하게 명시한 점이다.


 <우순소리>에는 71편의 우화가 들어있으며, 재판본에는 3편이 더 들어있다. 이솦우화의 성격을 띠고 재창작한 글의 말미엔 그 당시의 외세와 부패한 집권층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곁들였다. 작품마다 그의 폭넓고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이 넘쳐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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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yoon
윤경남
74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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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1
[샬롬문화시리즈(13]풍운아 윤치호의 해학(諧謔)과 [우순소리](1)

 

 

유머나 해학(諧謔)은 얼핏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희극의 가면 뒤에 비극이 숨어있듯이 해학은 재미 이상의 풍자와 비판을 통해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고차원의 문학형태이다.


2012년에, 필자가 역술하여 출간한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 속의 주인공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그리스도인 정치가인 윤치호는 그의 영문일기와 역술서와 풍자소설인 <우순소리>등을 통해 풍부한 해학을 보여준다.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에 나오는 아이러닉한 표현 하나. 학부협판인 윤치호가 민영환 특명전권공사를 수행하여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을 때의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숱한 일화 중의 하나가 1896년 5월 24일 일기에 나온다. 


“모스크바, 비오다; 대관식이 열리는 도미션 대성당은, 러시아의 황족, 고위 성직자들과 외국사절들 외에는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교회이다. 그 교회에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모자를 벗어야 한다…민영환 공은 조선동방예의지국의 예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잠깐이라도 갓(사모, 紗帽)을 벗어야 한다는 의례를 완강하고 단호하게 끝내 거부했다…나는 민 공의 마음을 바꾸도록 간곡하게 설득해 보았다. 막중한 임무를 가지고 상감의 어명을 받들고 대관식에 온 사람임을 강조하고, 잠시 동안만 그 고루한 조선 관습을 접어두는 일이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님을 재차 간청했다. ‘그래도 난 안 들어가!!’ 민 공은 고집 센 당나귀보다 더 완강했다…”


나라의 비운을 빗댄 코메디같은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다녀온 후, 윤치호는 개성에 남감리교회가 주도하는 한영서원을 설립하여 현실적인 산업교육을 장려한다. 그 외에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 교장, YMCA 회장, 연희전문학교와 이화여전 이사로도 활동한다.

 

 

 

 


1935년, 정동에 있던 이화여전이 신촌에 새로 석조 건물을 짓고 이전할 때의 유머러스한 일화를 <윤치호선집1호, 1998년 을유문화사간행>에서 인용한다.


 “이화학당은 1885년에 북감리교 여선교사 스크랜턴 부인에 의해서 처음으로 개설되었고, 이화학당은 명성 황후가 지어준 이름이다. 1888년 정동의 작은 기와집에서 단 일곱 명의 학생을 데리고 시작한 이화학당을 1920년에 근대식 양옥에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여학교로 만든 것은 역시 북감리교의 여선교사였던 미스 프라이였으며, 그것을 다시 1925년에 전문학교로 확장하고 1935년에는 신촌에 대규모의 석조 건물을 지어 오늘의 이화대학으로 만든 것은, 감리교의 초대목사로 정동교회와 배재학당을 창설한 아펜젤러 1세의 따님인 미스 앨리스 아펜젤러의 노력과 헌신에 의한 것이었다.


 이화학당의 새 건물을 짓는 데 아펜젤러 교장의 비상한 노력은 다시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집을 직접 설계하고 건축기금까지 얻어온 스와인하트 선교사의 공적을 무시할 수가 없다. 


 그런데 건물은 완성되었으나 내부의 장식과 비품을 마련하자면 돈이 더 필요하므로 스와인하트 씨에게 다시 한 번 미국에 가서 기부금을 더 얻어달라고 졸랐으나 미국도 기부금을 얻기가 매우 어려워졌다고 잘 듣지를 않았다. 그래서 이화의 김활란 박사는 윤치호선생을 앞세워서 각 신문사를 찾아 다니며 ‘사회 단체가 주관하여 스와인하트 씨에 대한 위로와 감사회를 베풀고 다시 한 번 미국에 다녀오도록 격려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며칠 후에 종로 3가에 있던 명월관에서 스와인하트씨에 대한 감사와 오찬회를 베풀게 되었다. 그날은 몹시 더운 여름날이었는데, 백여 명의 각계 대표와 언더우드 박사 이하 미국인 남녀들도 많이 왔었다. 주빈석에는 스와인하트 씨가 앉았고, 주인석에는 좌옹 윤치호 선생이 좌장으로 앉아 있었다. 


 이윽고 연회가 시작되자, 만당의 박수 소리와 함께 좌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스와인하트 씨가 미국에서 기부금을 얻어온 덕택으로 우리 이화의 새 교사가 완성된 것을 자축하고, 스와인하트 씨의 수고에 대해서 감사를 하자는 것인데, 이 경사스러운 자리에서 나는 한국의 고유한 옛날 이야기를 하나 하려고 합니다.”


 좌옹은 고상하고 우아한 영어로 나직한 목소리로 차근차근하게 말하는 것이 마치 무슨 음악이나 듣는 것 같았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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